김대건 최양업 신부님 마카오 & 마닐라 복음과 은총, 축복의 성지순례 일정 전국예약센터 월드라이프여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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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1821-1846, 25세)
조선후기 병오박해 당시의 신부로서,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
본관은 김해(金海). 세례명은 안드레아. 초명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 충청남도 당진 출신. 아버지는 김제준(金濟俊)이다.
옥중에서도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色圖化)해서 정부에 제출하여 한국 지리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 벽에 김대건신부의 초상화가 걸려있을 정도로 세계가 인정하는 성인으로 추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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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신부를 이은한국 가톨릭 교회의 두 번째사제이다.
1821년 충청도 홍주 다락골 새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839년 기해박해에서 순교해 한국 103위 순교성인에 오른 인물이고,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도 남편과 함께 순교했다. 다만 어머니는 순교 전에 아이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고 잠시 배교했던 전력 때문에 103위 성인 시성에는 들지 못했다가, 2014년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가 시복되면서 복자품에 올랐다. 최양업은 독실한 가톨릭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본시 한양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1836년 김대건 안드레아,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임시로 만든 신학교에 입학했다. 1839년 아편문제로 민란이 일어나자 필리핀 롤롬보이 도미니코 수도회 농장으로 피난갔다 오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신학 공부를 꾸준하게 매진하였고 중국의 정치적인 사정과 겹치면서 신학 공부는 했다가 중단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1844년 부제품을 받았고. 먼저 사제품을 받은 동기 김대건 신부는 조선에서 사목을 하다가 1년만에 그만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 그도 귀국하려다가 실패한다.
1847년 홍콩으로 이주한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에서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1849년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요동에서 사목하면서 지내다가 극적으로 귀국에 성공하여 1850년부터 사목을 시작하는데, 그 여정이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배티성지를 기반으로 천안 이남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지방의 127곳에 달하는 천주교 성당 공소 모두를 도보로 걸어 다녔는데, 한 해 동안 7,000리(약 2,800km)를 걷는 이 생활을 무려 11년 6개월이나 계속했다. 1,000리가 대충 392.7km고,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부산 터미널까지 거리가 약 380.4km임을 견주어 볼때. 즉 1년에 서울-부산을 3번 반이나 걸어서 왕복한 셈이다.
바쁠 때에는 하루에 80~100리(약 32~40km)를 걸으며 밤에는 고해성사를 해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나며 한달 동안 잠을 잔 날이 나흘밖에 안 됐다고 하니 놀라운 은총으로 복음에 대한 집념적 의지와 노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것이다.
각지에 흩어진 공소 127군데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고해성사와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이 와중에 기해박해 이후 조선에 못 들어오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주교와 신부들을 다시 초청해 조선 천주교회를 재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공헌하였다.
앞 시대의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도 수집했는데, 이 기록이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를 통해 교황청에 전해지면서 조선 시대의 최초 103위 성인을 선정할 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수 있었다.
이런 왕성한 활동은 필연적으로 과로로 이어졌고, 결국 1861년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치면서 경상북도 문경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또 다른 한국인 '강도영 마르코'가 1896년에 사제품을 받아서 세 번째 한국인 사제가 되기까지는 무려 35년이나 걸렸다. 최양업 신부가 사망하고 5년 뒤인 1866년에 조선 최대이자 최후의 박해였던 병인박해가 발생하였다. 만약 최양업 신부가 과로사로 사망하지 않고 살아있었더라도 아마 이때 박해를 받아 순교했을 가능성이 높다할것이다. 최양업 신부 사망 전후로 조선은 어느 정도 박해의 수위를 줄이기도 한 시기가 있었다, 대원군은 집정하면서 정치 외교적으로 천주교, 정확하게는 천주교의 뒤에 있는 서양 열강에 관심이 있었기에 생전 최양업 신부와 친분이 있는 이미 조정에 출사해 있던 남종삼 요한을 만나 이미 잠입해 있던 프랑스 선교사와 접촉을 시도하려 했다. 대원군과 프랑스 선교사가 만났더러면 당시 한국의 쇄국정책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 그러나 그 사이에 국제 정세가 악화되고 천주교에 대한 여론도 다시 나빠지면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된것이었다.
최양업 신부의 묘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있는데, 이곳은 박해가 한창일 때 많은 가톨릭 신자가 숨어있던 신앙촌이었고, 최양업 신부는 살아 있을 때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지속했다.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토굴도 여기 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천주교 원주교구 배론성지로 조성하였다. 유명한 성지이기 때문에 순례하러 오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있는 한국 가톨릭의 대표 성지로 꼽고 있다.
그의 초인적인 활동으로 인해 한국 천주교에서는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로 부르면서 최대의 흠모와 공경의 대상이 되어있고 최양업 신부의 이름을 딴 대안학교인 양업고등학교도 있을 정도로 존경받고있는 한국천주교 역사에서 대표적인 성인이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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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신부님들의 헌신적이고 숭고한 희생적 순교정신은 한국 천주교 후세의 신자분들뿐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성인으로 크게 추앙받고 있으며 또한 천주교 세계역사에서도 넘처나는 복음과 은총이 되어 그 깊고깊은 믿음의 큰뜻을 기리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의 역사를 열어주신 2분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뜻으로 천주교 신자 입장에서 그분들이 공부하시면서 거주하신 발자취를 남긴 역사적 현장인 필리핀과 마카오 성당 현장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가톨릭 신자로서 하느님과 함께하며 평안토록 살게해주신데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할수있는 성지순례 투어일정를 진개하고 있으니 전국 교우님들의 뜨거운 참여 성원과 두 신부님을 위해 기도를 부탁올립니다..... 대표 마태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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